신들의 황혼 감상 가이드

 

 

 

<제1막>

가끔 사람들이 링 싸이클을 어떻게 들어야 돼요?라고 묻곤한다. 그럴때마다 내 대답은 어김없이 반지는 엉덩이로 듣는 거예요. 괜히 머리나 귀로 들으려고 하지 마세요이다. 그 가장 어려운 고비가 바로 오늘 들을 신들의 황혼이다. 연주시간으로만 가볍게 4시간을 넘기는, 조금 느릿 느릿한 지휘자를 만나면 거의 5시간에 육박하는, 관객과 연주자 모두의 진을 빼는 공연이 바로 신들의 황혼이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역시 1막. 휴식시간없이 왜냐하면 한 막이니까 2 시간 가량, 화장실도 못가고 꼼짝없이 잡혀 있어야 한다. 이때 필수품은 귤. 부스럭 거리지 않고, 입이 심심하지 않고, 쓰레기 처리하기 좋고, 옆사람 눈치 보지 않아도 되고, 사이좋게 나눠 먹어도 되고..

 

1막이 이렇게 길다는 악명을 떨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제1서막과 제2서막이라는 두 덩어리가 본 막을 시작하기 전에 끼어 들기 때문이다.

 

1서막의 가장 볼만한 거리는 이다. 더 멋있게 이야기하면 노른이라 불리는 세 여인네가 잣고 있는 운명의 실이다. 무대 연출상의 어려움은 이 끈이 적절한 시기에 끊어지는 장치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점이다. 연출에 따라서 기다란 무명천에서 형광빛의 광케이블까지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는데, 발퀴레의 노퉁 뽑아내는 물푸레 나무가 연출 경향과 상관없이 항상 등장하듯이 이 끈도 또한 그렇다.

 

세 노른의 노래는 무척이나 구슬프고 음침하며 또 데카당뜨한 맛이 있다. 이 데카당뜨하다는 표현이야말로 신들의 황혼을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단어 아닐까?

 

2서막은 지크프리트 3막 마지막 장면의 연장이다.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를 질러 대는 남녀 주인공의 소리에 오케스트라까지 가세해서, 반지 전체에서 가장 시원하고 통쾌한 사운드를 즐기게 해준다. 제2서막에서 1막으로 연결시켜주는 부분의 음악이 그 유명한 지크프리트의 라인강 기행이다. 넘실대는 라인강이 현악기로 묘사되고, 그 사이를 유유히 노 저어가는 지크프리트가 관악기로 표현된다.

 

기비히: 군터가 결혼도 안한 젊은 나이에 어떻게 기비히 족속의 군주가 되었는지는 미스테리이다. 게다가 이복 형제에 반인반수에 가까운 하겐을 곁에 두고 지낸다는 점은, 사실 오페라 같은 허무 맹랑하고 개연성 적은 이야기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바그너 음악 학자인 Deryck Cooke은 이때 나오는 기비히/군터의 동기 ♬Gunther 가 칼의 동기 ♬Sword와 유사하다고 이야기하면서 군터나 칼이나 모두 지크프리트의 도구일 뿐이라는 의견을 개진한 적이 있는데, 내 개인적인 의견에는 .. 글쎄 잘 모르겠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군터 하겐 구트루네 세명의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몹시 지루할 수 있다는 점이다. 유도동기들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지난 일들을 설명할 때마다 오케스트라에서 흐르는 그야말로 1~2초 동안 뒤로 지나가는 풍부한 유도동기들을 즐길 수 있겠지만 (실제로 신들의 황혼 1막은 주요 유도동기들의 총 복습판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지난 며칠 동안 보았고 들었던 것들을 처음부터 또 다시 듣는 재미없는 부분이다. 과감하게 자자! 어치파 2시간 동안 어느 곳에서든 한번은 졸게 되어 있다. 옆 사람에게 지크프리트가 구트루네가 주는 술을 먹으면 깨워 주세요라는 부탁을 잊지 말도록.

 

굳이 깨어서 계속 보겠다면, 마법의 미혼약에 관해 하겐이 언급할 때 잘 들어 보도록 하자. 그리고 이것을 후에 나오는 타른헬렘과 비교해서 들어 보자. 두개가 유사하다고 느꼈다면 빙고! 두 가지 모두 다른 사람을 속이기 위한 도구로써의 공통점이 있음을 알아 챘는가? 그렇다면 이쯤에서 사기와 속임수와 말바꾸기의 제왕 로게의 유도동기가 이 두가지의 원형에 해당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있게 들리지 않는가? 글쓰는 이가 왜 그다지 바이올린/ 바이올린 주자들을 싫어하는지 남들은 이제 알아 줄래나 ?

 

미혼약을 먹은 지크프리트가 군터가 하는 브륀힐데 이야기를 들으면서 뒤로는 브륀힐데 관련 유도동기들이 마구 지나가는데 그녀에 대한 기억을 되찾아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표정을 꼭 놓치지 말고 보도록 해야한다. 어쩌면 가장 쉬운 표정 연기일지 모르지만, 이 연기 잘하는 가수 드물다.

 

피로 맺은 형제 ♬Blood-Brotherhood : 두 싸나이들 어찌 보면 두 영웅이라 불리우는 -의 혈맹 선서.  장중하고 멋있는 이 장면을 볼때마다 나는 사실 너무나 슬프다. 흘러가는 가사와 오케스트라의 빛남속에서 나는 거의 울고 싶은 듯한 감정을 느끼곤 한다. 두 사람의 이 맹세로 인해 신들의 황혼은 그 유래가 없는 비극으로 치달아 가는 것이다. 서로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아니 서로가 상대방을 위하고 도와주겠다고 맹세함으로 안하여, 이제 두사람은 상대방과 자기 자신을 죽음으로 처박아 넣게 되는 까닭이다.

 

하겐의 망루 노래: 하겐이 망루에 혼자 앉아 부른 이 노래를 Hagens Watch Song 이라 한다. 이 노래가 없었다면, 하겐은 착한 사람(?)이다. 그저 형이나 돕고 자기 백성들을 걱정하는 그런 착한 인물말이다. 그렇기에 가수는 여기서 이제까지 관객들이 몰랐던 가공할만한 공포심을 유발해내야 한다. 착한듯 포장된 하겐이 아니라, 남들이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하겐 내부의 흉측한 모습을 드러낼 첫 기회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기대해 마지 않는 악한 하겐. 그의 첫 데뷰 무대가 바로 여기이다.

 

여기서 하겐의 악마성, 야수성, 사악함과 음흉함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으면 그 베이스는 꽝이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바이로이트 무대에서 서셨었고 근 20년 가량 파프너/하겐 역을 맡으셨던 명베이스 강병운 선생님의 하겐은 굳이 언급해 볼만 하다. 맨 처음 바렌보임 링의 녹음을 들었을 때 첫 인상은 뭔가 약하다였다.  노래소리의 강약도 좋았고 반지를 차지하고야 말겠다는 느낌도 그래도 전달되었는데, 그때까지 들었던 다른 하겐들과 달랐다. 이상하게 슬픈 목소리였다. 아니 구슬픈 소리였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만약 하겐이 100% 악한이 아니라, 그 자신도 어쩔수 없이 떠밀려 그 자리에 서 있었는 존재였다면? 그가 끝끝내 지크프리트를 죽이고 잠시나마 반지를 차지하게 되더라도 그 역시 운명이라는 수레바퀴에 매달린 한낱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면 ? 강병운 선생님의 하겐은 냉혈한 하겐이 아니라 마치 자기에게 주어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맡고 싶지 않았던 역할을 해야만 하는 하겐의 목소리였다.

나는 아직도 짐승처럼 내질르는 목소리의 하겐이 좋다. 하지만 가끔씩은 바로 이 장면에서 들리는 강병운 선생님의 노래 소리를 듣곤 한다. 아무도 없는 방안에 혼자 불을 끄고 말이다.

 

이쯤에서 사람들은 1막을 끝내 주었으면 좋겠다고 사정할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이미 1시간 반동안 꼼짝 못하고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그너는 잔인하다. 아직 30분 더 기다려야 한다. 준비해 놓은 귤을 먹으며 버텨라. 없으면 옆 사람에게 달라고 하자.

 

발트라우테 : 아시다시피 발트라우테는 발퀴레이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발트라우테는 다음번 공연에서 브륀힐데를 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가수이다. 따라서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 놓는 것이 좋다. 어차피 오페라계 바닥은 좁아서 계속 만날 가능성이 높다.

 

브륀힐데가 부르는 사랑의 부인: 여기서 브륀힐데는 맨 마지막 소절을 바꿔 버림으로써 그녀의 의지 표현을 분명히 한다. 너무나 비장하고 멋짐.

 

군터로 분장한 지크프리트: 이 장면은 사실 웃고 넘어가야 한다. 테너가 재주껏 바리톤 흉내를 내야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있는 대로 목에 힘을 주며 소리를 아래로 끌어 내리는데 그게 그리 쉬운 일인가? 게다가 목소리의 톤은 군터 흉내를 내야 하지 않는가? 뒤에서 오케스트라는 계속 얘가 군터야, 진짜 군터야. 믿어줘라고 이야기 하듯 군터의 유도 동기를 때려가는데, 그 와중에 지그프리트가 땀 뻘뻘 흘리며 흉내내는 것을 보면 코믹하기까지 하다.

문제는 그 내용은 이와 정반대로 너무나 암울하다는 점이다. 남편을 기다리는 여자 앞에 나타난 제3의 남자. 그 남자가 실은 남편이었고 이제는 자기 아내를 남의 아내로 만들기 위해 변장까지 하고 서있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인 것이다. 억지로 반지를 빼앗고 나서 원래 자기 모습으로 돌아온 이 무심한 남자는 혼자 엉뚱한 걱정을 한다. 남의 아내(?)랑 같이 자면 안되자나. 그래서 이 어이없는 지크프리트는 브륀힐데도 뻔히 알고 있는 칼 노퉁 을 둘 사이에 두고 밤을 새우기로 한다. 이런 한심한 상황에서 아주 잠깐 나오는 명예 Honour 라는 주제가 바로 칼의 유도동기에서 나왔음은 너무 분명하다.

 

이제 1막이 끝났다. 아마도 당신은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릴 것이다: 돈 쓰고 고생하고. 이것이 무슨 짓이란 말인가?  옆을 돌아보라. 마치 모든 것을 알고 다 이해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걸어 나오는 그 사람도 실은 당신과 꼭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지금은 바그너 음악 감상 시간중 가장 즐거운 시간 휴식 시간 이다.

 

<제 2막>

아버지와 아들: 놀랍게도 제2막은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로 시작한다. 그것도 극 전체에서 1 2위를 다투는 악당 부자의 대화로 말이다. 이 둘중 누가 더 나쁜 존재인가는 사람들마다 의견이 엇갈린다. 사기와 기만으로 주변 사람들을 모조리 불행으로 몰아 넣는 하겐이 더 악한인지, 자신의 원래 목표에 충실(?)하다 못해 끝내는 아들의 꿈속에까지 나타난 알베리히가 더 독한 악당의 모습을 보여 준 것인지 ..

 

사실 이 장면이 하겐의 꿈인지 아니면 생시인지에 대해서는 연출가마다 서로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그저 여기서는 현대적 급진적 좌파적인 해석을 하는 연출가일수록 알베리히가 죽지 않고 즉 꿈이 아니라 살아서 하겐에게 나타났다고 보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해 두자.

 

스티어호른 ♬Steerhorn  : 반지에 쓰이는 이상한 악기(?) 이야기가 나오면 반드시 언급해야 할 것이 하겐이 부는 스티어호른이다. 원래 이런 악기는 있지도 않고 또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다. 원 작곡가의 의도대로라면 외적이 쳐들어 오는 등의 급박한 비상사태 신호용으로 불렀음직한, 그런 둔탁하고 거친 뿔피리 소리가 이 스티어호른이다. 1960년대에 녹음된 솔티 링의 뒷 이야기를 읽어 보면 아무도 정확하게 이것이 무엇인지 몰라 헤매다가 그 당시 바이로이트의 악기상에게 특별 주문 생산해서 그 소리를 재연(?)한 기록이 나온다. 물론 이런 쓸데없는 악기를 만든 악기상은 곧 문을 닫았고, 요즘 오케스트라에서는 당연히 트럼본이 이 역할을 맡고 있다. 굳이 스티어호른 소리가 궁금한 사람은 솔티 링을 들어 보거나, 솔티 링의 메이킹 필름인 Golden Ring을 보면 좀더 자세히 스티어 호른을 볼 수 있다. (이 필름은 보면 작곡가의 무대 지시대로 가운데 왼쪽 오른쪽의 순서로, 그중 왼쪽과 오른 쪽은 off-stage로 스티어호른 소리를 만들려는 가상한 노력을 볼 수 있다.)

 

합창: 이제까지 13시간 이상 달려오면서 한번도 합창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 챘는가? 반지 전체에서 가장 즐겁고 활기찬 이 부분은 그냥 즐기면 된다. 합창 앞 부분의 대사는 전쟁인줄 알고 달려온 사람들의 걱정과 불안이 대부분이고, 뒷 부분은 유쾌하기까지한 하겐의 결혼식 선포와 그 응답이다. 오죽하면 기비히 신하들이 근엄한 자 하겐이 이다지 좋아하다니라는 대사가 있을까? 개인적으로 반지 전체에서 유일하게 즐겁고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브륀힐데가 (끌려서) 입장하는 장면에서 신하들이 부르는 장엄한 합창도 가만히 들어보면 이미 여러 번 나왔던 군터 유도동기의 변형이다. 원 동기를 느리게 만들면서 불러보면 쉼게 두개가 동일한 것이었음을 알수 있다.

 

여기서 잡혀온 브륀힐데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눈을 들지 않는다. 군터가 복된 두 쌍이라며 브륀힐데와 군터, 구트루네와 지그프리트의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말이다.  여기서 한동안 브륀힐데의 얼굴 표정연기와 뒤로 지나가는 오케스트라의 유도동기들을 신경써서 볼 필요가 있다. 브륀힐데의 생각과 논리가 가사로 쭉 연결된다면, 그녀가 가진 혼란의 감정과 온갖 회상 flashback들은 오케스트라가 맡아서 처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겐의 창: 나는 가끔씩 왜 하겐의 창은 보탄의 창과 달리, 극중 주요 사물 artifact가 되지 못했을까 궁금하곤 하다. 비록 보탄의 창은 그 태생부터가 우주목을 꺽어서 만든, 룬 문자가 새겨진 계약의 창이라고 할지 몰라도, 적어도 하겐의 창도 금강불괴 불사의 몸을 가진 지크프리트를 쳐 죽이는데 일조한 창인데 말이다.

 

복수의 삼중창 Venegeance Trio : 브륀힐데 군터 하겐 3인방이 모여서 지크프리트의 죽음을 모의하는 장면이 나름대로 유명한 복수의 삼중창이다.  가사를 보면 그 와중에서도 사람들마다 각자 자기가 원하는 것이 다르고, 특히 군터와 브륀힐데는 보탄에게, 하겐은 알베리히에게 기원하는 것이 재미있다. 시끄럽기는 하지만, 그 내용을 가만히 들어보면 소름이 쫙쫙 끼치는 그런 부분이다.

 

<제3막>

지크프리트의 나팔 소리로 시작하는 3막 서곡은 극의 맨 마지막 부분을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 처음의 바로 그 지점 라인 강변 으로 다시 돌려 놓는다. 자기 추종자들이 혹시라도 줄거리를 못 쫒아 올까봐 걱정하는 친절한 바그너씨는 이미 수십번 되풀이된 지난 이야기 또 하기를 여기서도 여지없이 반복하고 있다. 같은 이유에서 만약 반지에서 단 1막만 보고 전체 내용을 파악해야 한다면 주저없이 신들의 황혼 3막을 보아야 한다.

 

어떤 이들인 알베리히가 실패한 그 자리에서 신인류 지크프리트가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대조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셋팅이라는데,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둘 다 우리가 아는바 처럼 실패한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반지를 돌려 달라는 라인 처녀들과 못 돌려 주겠다는 지크프리트의 대화는 거의 코미디 수준이다. 그중 제일 웃긴 부분만 옮겨보자. 라인 처녀들이 반지를 달라고 했다가 웃으며 거절당하자,

당신 그렇게 쨰째해요? (보글린데)

그리 따지고 인색한가요? (벨군데)

여자한테는 잘해줘야 해요. (플로스힐데)

내 물건들을 너희들에게 허비하면 내 마누라가 화낼걸? (지크프리트)

성깔 나쁜 여자인가 보구나. (플로스힐데)

*** 당신 매 맞고 살아요 ? (벨군데) ***

우리 영웅께서는 벌써 마나님의 손을 느끼시나 보다. (보글린데)

아주 잠깐이지만, 바그너가 첫번째 아내 민나에게 손으로 맞는 장면이 상상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생생하게 이런 장면을 그려낼 수 있었을까?

 

반지를 돌려달라는 라인 처녀들의 부탁을 지크프리트는 너무나 가볍게 거절한다. 반지의 시작과 그에 담긴 사연들, 그리고 그가 반지를 넘기지 않았을 떄 당할 일들에 대해서까지 모두 이야기해 주었는데 말이다. 이런 예언을 듣고도 단순무식하게 자기 멋대로 하는 사람을 영웅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나마 지크프리트는 이런 식으로 자기 멋대로 하면서 끝까지 성공한 케이스도 아니지 않은가?

 

니벨룽이라는 단어가 들어가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니벨룽의 반지와 중세 독일의 대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가 실은 같은 작품일 것이라고 넘겨 짚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 이 주제로 박사 학위 받은 사람들도 많겠지만 내 입장에서 이 둘은 전혀 다른 문학 작품이고 그 지향점이 다른 별개의 예술 작품이다. 게다가 둘 사이의 연관성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약하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 장면. 지크프리트가 라인강가에서 라인의 처녀들을 만난 것이 반지라면, 노래에서는 하겐이 다뉴브 강가에서 인어를 만난 것으로 되어 있지 않은가? 물론 인어나 처녀나 모두 3명씩이었고, 양쪽의 예언 내용 역시 너는 죽게 될 것이다라는 점이 공통점이라고 우기면 나도 할 말 없다. 하지만 백보 양보해서 같은 전설의 기본 모티브는 차용했다 하더라도 이 정도의 차이를 보면서도 노래가 반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하기에는 너무 무리가 있지 않은가?

 

지크프리트의 어린 시절 이야기: 산새의 유도동기에 맞추어 지크프리트가 부른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운 적이 있었다. 이제까지 그가 지나온 역경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지크프리트를 바보 병신이라고 욕했어도, 불쌍한 것은 불쌍했기 때문이었을까? 이 부분들을 잘 들으면 사실상 전날 공연했던 지크프리트를 본 효과가 있다.

 

하겐이 지크프리트의 등을 찌를떄 나오는 유도동기는 당연히 --à 저주 ♬Curse이다. 이 저주 라는 동기가 쓰였던 장면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 알베리히가 반지의 주인에 대해 저주를 할 때

  • 거인 파프너가 보물 분배를 놓고 파졸트를 쳐죽인 직후

  • 파프너가 지그프리트의 칼에 맞고 넘어지면서

  • 지그프리트가 미메를 죽일 때

  • 지그프리트가 군터를 위해 변장을 하고 브룬힐데를 얻어다 주겠다고 제안할 때

  • 하겐, 군터, 브룬힐데가 지그프리트의 죽음을 모의하며

  • 하겐이 지그프리트의 등을 찌르면서

  • 하겐이 반지에 손대지 말라며 라인강으로 뛰어들 때

저주가 실현된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이제는 느낄수 있겠나 ?

 

로마의 시져에게 e tu, Bruti? (부르투스, 너까지?)가 있었다면, 링에서는 Hagen, was tust du? Was tatest du? (하겐, 무엇을 하고 있어? 무슨 짓을 한거야?) 가 있다.

 

이 다음에 나오는 지크프리트의 노래 지크프리트의 아리아라고 부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것은 정말이지 눈물없이 들을 수 없는 아름다운 곡이다. 브륀힐데를 처음 깨웠을 때 나오던 기상 Awakening의 주제와 브륀힐데의 이름으로 시작해서 그대 일어나 눈을 뜨오로 이어지는 가사는 너무 늦게 정신차린 남편의 마지막 사모곡이라고나 할까? 가수 입장에서는 더 이상 노래 부를 것이 남아 있지 않으니, 있는 힘껏 마지막 힘을 다해 부르게 될 것이고 역시 이때의 표정 연기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제 혹시 옆 사람이 졸고 있다면 깨워 주도록 하자. 아마도 반지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두 장면이 곧이어 펼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지크프리트의 장송 행진곡: 무슨 말이 필요하랴 ! 그가 헤쳐온 길들을 기억해 보라. 대장간, 미메, 노퉁, 커다란 용, 산새, 바위산, 브륀힐데와의 만남, 군터, 하겐, 그가 가졌던 공포와 사랑, 그가 품었던 기쁨과 환희, 맹세, 그리고 그로 인한 배신과 기만, 그리고 이제 그의 죽음까지. 지크프리트를 쫒아 여기까지 온 당신도 앞으로는 이 곡을 전혀 색다른 느낌으로 듣게 될 것이다. 그의 죽음에, 아니 다시 보지 못할 영웅의 죽음에 대한 깊은 애도를 느끼면서 말이다.

 

(이 곡은 원래 깜깜하게 해놓고 눈감고 들어야, 감정 게이지 100%로 올라오는 곡이다. 그런데 무대 연출가에 따라서는 이 와중에도 극 내용이 진행되곤 한다. 그래서 반드시 눈을 감고 회상하며 들으라고 강요할 수 없다. 아쉽다.)

 

Immolation 1 : 어쩌면 이 한곡의 아리아를 듣기 위해서 지난 3박 4일을 달려 왔는지도 모른다. 15시간 공연의 마지막 20분을 채우는 브륀힐데만의 노래.

마치 권위를 상징하는 보탄의 창을 꺼꾸로 뒤집어 놓은 듯한, 그래서 Spear Inversion 이라고 이름 붙은, 아래서 위로 쳐 올라가는 트럼펫 소리들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모든 소프라노의 꿈이다. 20분 동안 그녀는 세상의 모든 잘못된 것들을 고치고, 그녀에게 주어졌던 받아 들일 수 없는 현실의 뒷 면을 파악해 내고, 그리고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아니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람의 뒤를 쫒아가야 한다. 어찌 비장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게다가 쉴 틈도 없이 혼자 노래 불러야지, 노래 가사에 맞춰 표정 연기 해야지, 반지 뽑아서 라인 처녀들이게 전해 주어야지, 그야말로 바쁘다 바뻐이다. 이 모든 것 한다고 해서 노래 소리가 약해지기라도 한다면, 그녀는 이미 약한 브륀힐데로 낙인 찍혀 영 재미없는, 경쟁력 없는 가수가 되버리고 만다. 언젠가는 브륀힐데 역의 가수가 공연을 끝내고 얼마나 많이 먹을까 상상해 본적이 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내 예상은 무지 많이였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만한 곡이다.

 

Immolation 2: 무대 위에서 어떻게 불을 내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은 둘 밖에 없다. 그 하나는 진짜로 무대에서 불을 지르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조명을 이용하는 것이다. 전자로 유명한 공연은 미국 시애틀의 반지 공연이다. 무대 역사상 가장 큰 불 놀이라는 캐치 프레이즈와 함께 시애틀 소방서장의 특별 감사결과 안전하다는 허가증을 마켓팅 재료로 삼을 정도였으니 대충 감이 잡히시리라. 문제는 환기가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든다는 점. 그래서 대부분의 극장에서는 싸고 간단한 쪽 조명으로 대충 때우는 을 선호한다.

 

반지에서 물러서 ! Zuruck vom Ring! : 하겐이 물로 뛰어들며 던지는, 반지의 맨 마지막 대사인 이 말처럼 인간의 탐욕성을 대변하는 대사가 또 있을까?

 

구속 Redemption : 하겐이 물에 빠지고 난후, 나오는 오케스트라는 반지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케스트라 소품이다. 이제까지 나왔던 주요 동기들이 총출동할뿐만 아니라 그 나열순서가 반지 전체의 이야기 구조와 흡사하고 동시에 그 덧없음에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다만 맨 마지막의 마지막 동기가 지크프리트와 신들의 황혼 유도 동기 바로 다음에 나오는 흔히 구속 Redemption이라고 부르는 유도동기였다는 사실만큼은 말해두자. 그 구속이 무엇이었던 간에.

 

 

3박4일의  기나긴 여행이 끝났다. 이제 반지라고 불리우는 환상과 경이로 가득찬 세상을 덮고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더 이상 고민하는 보탄도, 날뛰는 지크프리트도, 모든 것을 지켜보고 모든 것을 용서해주는 브륀힐데도, 그리고 추악한 알베리히나 하겐도 없는 세상속으로 말이다. 하지만 왜 자꾸만 그 세상이 이 세상보다 나아 보일까?

 

마지막으로 이제 당신이 티셔츠 하나를 만들 차례이다. 그 티셔츠에는 이렇게 써야 한다:  I Survived The Ring Cycle.  Seoul September 2005.  만약 당신이 센스가 있다면 당연히 이 문구들은 동그란 반지 모양으로 써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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