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퀴레 감상 가이드

 

 

 

<제1막>

발퀴레의 서곡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다섯 음이 꺽여서 다시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또 꺽여 오르는 것이 반복되는, 폭풍 ♬Storm라는 유도동기로 가득차 있다. 잘 들어보면 맨 마지막에 어제 들었던 천둥의 신 도너의 주제도 들린다.

 

일반적으로 링싸이클 중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바로 발퀴레이다. 흔히 하는 설명으로는 작품 자체가 하나의 오페라로 떼어 놓아도 말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른 작품보다 그런 성격이 강한 것도 사실이지만, 내가 보기에 그저 표면적인 주제가 사람들이 접근하기 쉬워 보여서 그렇지 않을까 한다.

얼핏 보면 발퀴레야말로 출생의 비밀을 알아차린 사랑하는 두 남녀, 그리고 그들의 사랑을 집요하게 반대한 세력과, 마지막에 스스로를 버리면서까지 도우려는 한 고귀한 여인네의 희생 이야기라는 지극히 낭만적인 스토리처럼 들린다. 마치 이태리 오페라 같다. 하지만 같은 이야기속에는 오누이간의 근친 상간, 강제 결혼, 씨족간의 피 비린내 나는 복수극, 불타 버린 집, 복수의 칼질, 주도권 확보를 위한 가정내의 불화, 앞으로 벌어질 일들로 인한 불안, 자기의 원뜻과 반대되는 명령, 애원하는 딸을 무자비하게 벌하는 아버지등, 온갖 추잡함과 폭력이 난무하는 드라마이다. 나는 사람들이 왜 이런 스토리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언제나처럼 무대가 열리면 어떻게 만들었나 보아라. (만약 게르기에프의 링을 보고자 한다면, 어제 보았던 돌들이 어떻게 달라졌나 살펴 보아라.) 반지 무대에서 제 아무리 연출이 고전적 혹은 현대적이던 간에 바뀌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으니 바로 여기이다. 무대 정중앙을 가로지르는 나무 하나와 그 칼 말이다. 그 칼이 나무에서 나오게 되면 1막이 끝나게 되는데, 아마도 시간이 좀 지나면 당신도 속으로 빨리 저 칼을 뽑아 버리지 않고 뭘 꾸물거리는 거야 하며 화를 내게 될 것이다.

 

지그문트와 지글린데: 비틀거리며 들어온 남자. 착하지만 자아 의식은 없는 여자. 이 둘 사이에 흐르는 애절한 유도동기가 바로 사랑이다. 이때 두 사람의 표정 연기를 보아야 한다. 여기서 서로 스파크가 튀지 않는다면, 나중에 서로 껴안고 도망치고 심지어는 애까지 낳는 모든 이야기가 구라가 되기 때문이다.

 

멋진 팡파레와 함께 등장하는 훈딩 ♬Hunding. 이 아저씨의 의상은 모든 디자이너들의 공통된 숙제이다. 산적 두목같이 보일 것인지, 쁘띠 브루죠아같이 할 것인지, 큰 집과 많은 식솔의 주인인 것을 표현해내야 하는데,  이것은 실은 상당히 머리 뽀개지는 작업이다. 또  이 아저씨와 지그문트간의 대화는 피와 복수와 폭력으로 얼룩져 있다. 그런 이야기를 단순히 비극적이거나 불쌍하다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은 사실을 지나치게 미화하는 것이다.

 

봘제! 봘제! ♬Walse! Walse!  :  지그문트 역을 맡은 테너 최대의 아리아. 봘~제의 봘~ 은 당연히 길게 뽑게 되어 있는데,  세계 기록이 43초라는 비공식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 참!  이 긴 독백과 마치 당장이라도 칼을 뽑을 듯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칼은 뽑지 않는다. 참 바그너스럽다.

 

겨울폭풍 지나고 Winterstrume: 원래 무대 지시대로라면 지그문트의 노래에 맞추어 뒷 배경이 날라가고 밝은 달이 나타나고 평화롭고 조용하며 낭만적인 분위기가 가득찬 봄날이 되어야 한다. 이 부분을 링 싸이클중 가장 낭만적인 장면이라고 꼽기도 한다. 하지만 워낙 바그너가 낭만적인 것들과는 거리가 멀어서 그의 작품중 낭만적이라고 우기는 것이지 별로 낭만적인 줄 모르겠다. 여기는 곧 또 다시 칼 이야기가 나오는 상황이란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나오는 부드러운 멜로디가 서곡에 가득 깔려 있던 폭풍 동기의 (궁극적으로는 자연의 동기에서 나온)  순화된 버전이라고 하는데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

 

Renunciation of Love (사랑의 부인): 반지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킨 부분. 이유는 가사의 내용과 유도동기의 사용이 사실상 상반되기 때문이다. 하도 말이 많기 때문에 자세히 알아보자. 일단 발퀴레에서 쓰이는 가사는 다음과 같다.

< 거룩한 사랑의 가장 깊은 필요, 타는 듯한 사랑의 불타는 욕망 >

하지만 이때 쓰인 멜로디가 어디선가 들은 듯 하지 않은가? 바로 라인황금에서 보글린데가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할 때 썼던 유도동기이다.

< 사랑의 힘을 부인한 자만이, 사랑의 즐거움을 포기한 자만이, (황금을 반지로 만들 마법을 가질 수 있다.) >

같은 동기에 전혀 상반되는 가사의 내용. 어느 쪽이 진짜일까? 아니면 이 둘을 통합하는 더 고차원적인 개념/느낌이 있을까? 이야기가 더 복잡해지는 것은 신들의 황혼에 꼭 같은 유도 동기가 나오는 데 브륀힐데가 부르는 그 가사가 < 나는 사랑을 내놓지 않을 것이고, 그들은 내게서 사랑을 뺏어가지 못할 거예요> 라는 나오는데 있다.

이외에도 오케스트라가 이 멜로디를 사용하는 부분이 더 있지만, 일단 이 세가지를 포괄하는 명칭이 무엇이 있을까? 작곡가가 의도적으로(!) 이 세가지를 하나로 묶었을 때 그의 속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수많은 바그너 학자들의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요즘 내 생각은 바그너가 사람들 골탕 먹이려고  이렇게 만들었던 것 같다.

 

노퉁! 노퉁! ♬Nothung! Nothung!  : 이 멜로디가 앞서 들었던 봘제! 봘제!의 멜로디랑 꼭 같다는 것은 느꼈는가? 지그문트에게 가르쳐준 아버지의 이름이 실은 그를 위해 준비해 놓은 바로 그 칼의 이름이었다. 이름은 서로 다르지만 봘제와 노퉁 음악적으로 보면 둘은 꼭 같은 하나인 것이다. 멋지지 않은가? 속으로 아하라고 생각했다면, 이제 당신도 유도동기의 마력에 빠져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고맙게도, 너무나 고맙게도, 칼을 나무에서 빼고 막이 떨어진다. 배가 고프고 지친 느낌이 들면 당신은 정상인이다.

 

<제2막>

처음으로 발퀴레의 괴성 호이토호를 들을 수 있는 부분. 발할라의 내부를 어떻게 묘사했나부터 살펴 보도록 하자.

 

보탄과 프리카의 부부 싸움 장면: 옛날부터 마누라 이기는 남편은 없었다. 그나마 이 날의 주제는 당신이 저질러 놓은 일. 이제는 깨끗이 정리해라. 우리 체면도 있지 않는냐? 이기에 보탄이 깨지는 것은 당연지사. 원래 이 장면에서 프리카는 양이 끄는 수레를 타고 등장해야 한다.

 

보탄의 독백: 만약 당신이 링 싸이클을 처음 보면서 이 장면에서 졸지 않거나 지루하게 느끼지 않았다면, 당신은 거짓말쟁이이다. 여기서 보탄은 라인황금에서 있었던 모든 이야기들을 다시 한번 총정리해주고 그 이후에 있었던 일들 알베리히가 아들을 나은 이야기며, 지그문트에 대한 계획등 을 주저리 주저리 노래한다.

개인적으로는 발퀴레 전체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취향이 이상하기도 하지.) 보탄역을 맡은 가수가 과연 그 역을 맡을 만한 사람이었는지 살펴보기 가장 좋은 부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처음 듣는 사람에게는 잠자기 딱 좋은 부분이다. (푹 자도 내용상 특별히 놓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역시 표정 연기를 유심히 보아야 한다.

 

아버지와 딸 1: 두 사람의 얼굴 표정에 관심을 두고 보라. 아버지는 자기 마음을 숨기고 어쩔수 없는 명령을 내리고, 딸은 그 표정에서 진짜 명령을 읽는다. 하지만 극의 방향은 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흐른다.

 

지그문트와 지그린데가 쫒기는 장면은 중요하기는 한데, 지겹기는 마찬가지이다. 아까 못 잤다면 지금이 잘 타이밍이다.

 

뉴욕의 멋쟁이들은 발퀴레 2막을 통째로 빼먹고 나가서, 근사한 저녁 식사를 즐기고 3막 시간에 맞추어 돌아오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스테이크에, 디저트, 커피까지 마시면 시간이 딱 맞는다나?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때는 몹시 분노했었는데, 요즘은 생각이 바뀌었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정말 현명한 족속일지 모른다는 생각말이다.

 

브륀힐데와 지그문트 : 뒤로 깔리는 엄숙한 느낌의 주제는 ♬Annunciation of Death 이다. 이 장면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시아버지(지그문트) 대하는 며느리(브륀힐데)의 태도가 영 아니올시다라는 점이다.

 

<제3막>

 

발퀴레의 비행: 많은 사람들이 이 곡 하나 때문에 발퀴레를 보러온다. 기괴하기 그 유례가 없는 이 곡도 가만히 들어보면 너무나 간단한 3가지의 유도동기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첫째는 딴따라 딴따다다하는 말발굽소리 유도동기이고, 두번째는 바이올린이 시원하게 위에서 아래로 긁어 내리면서 내는 말의 ~이잉소리처럼 들리는 유도동기가 두번째, 마지막으로 너무나 유명한 관악기들의 총주로 이루어지는 발퀴레 유도동기가 그 셋이다.

누구든지 처음 듣는 순간부터 번개 맞은듯이 전율할 수 밖에 없는 이 곡의 진짜 문제점은 약 5분여의 연주 시간동안 이 3가지 주제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람의 혼을 빼놓는 듯한 곡에서도 진정 음악적인 부분은 별로 없다. (이런 식이 바그너 음악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

 

호이토호 : 발퀴레끼리 서로를 부르는 소리. 이 여자들중에 소리를 잘 지르는 여자가 다음번 브륀힐데를 잡을 수 있기 때문에 다들 열심히들 한다. 그래서 몹시 시끄럽고 정신 사납다.

 

그라네 : 브륀힐데의 애마. 원래 무대에 진짜 말을 올려야 된다고 고집했던 사람은 바그너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러던 바그너도 단 1회의 무대 연습만으로 살아 있는 진짜 말이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살아있는 진짜 말이 진짜 똥을 쌌기 때문이다. 그 이후 반지 공연에서는 살아있는 말을 볼 수 없었다. (1976년 바이로이트의 100주년 기념 링에서 다시 시도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마도 같은 이유로 1977년 공연부터는 말이 사라져 버렸다.) 또 십수년전 베를린 오페라에서는 까만 유광 라텍스 옷을 입은 발퀴레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무대 위를 돌아 다녔다는 소식도 있다.

 

여기서 여배우 생김새 이야기를 잠깐 해보자. 전세계적으로 브륀힐데를 노래할 수 있는 바그네리안 소프라노는 몇 명 안된다. 긴 프레이즈, 독일어 발성, 충분한 고음에, 4시간 짜리 무대를 버틸 소프라노가 그리 많겠는가? 그래서 살아남은 바그네리안 소프라노들은 한 가지 특징을 공유한다. 바로 무지막지한 몸매이다. 금발머리에 하얀 피부, 햇빛에 그을린 얼굴에 굳게 다문 다부진 입술, 젊고 섹시하며 매력적이고 강한 게르만 여전사를 꿈꾸는가? 꿈 깨라! 현실은 당신 눈 앞이다.

 

구속 ♬Redemption: 발퀴레 전체에서 가장 감격스러운 부분은 브륀힐데가 지그린데에게 부러진 노퉁 조각을 주면서 그녀의 태안에 봘숭족의 영웅이 있다는 말을 전하는 장면이다. 이때 흐르는 유도동기가 바로 지크프리트♬Siegfried 이다. 즉 태어날 아기가 누군지 미리 암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곧이어 나오는 지그린데의 노래 뒤로 나오는 동기가 그 유명한 구속 ♬Redemption이다.

 

아버지와 딸 2: 만약 당신이 2막에서 잠을 자지 못하였다면, 지금이 절호의 찬스이다. 화난 아버지와 그 화를 달래야 되는 딸의 이야기인데, 솔직히 양쪽 다 논리가 빈약하다. 게다가 가사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딸의 애절한 호소에 아버지는 더더욱 잔인한 말만 늘어 놓는다. 이런 아버지 밑에 있으면서 브륀힐데가 오래전에 가출 청소년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하지만 여기서 아버지의 뱉는 말과 그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정반대라는 사실을 당신은 눈치챘는가?

 

브륀힐데를 어떻게 불로 감쌀 것인가는 발퀴레 연출가의 가장 큰 숙제이다. 그냥 쉽게 연기와 붉은 색 조명으로 하는 법도 있고, 허공에 레이져 광선으로 박스를 그리고 그 안에 가두기도 하고, 서울 공연에서는 어떻게 할지 궁금하다.

 

마법의 불 ♬Magic Fire: 사악한 바이올린과 로게를 기억하는가? 발퀴레 마지막 10여분은 이 둘이 꽉 잡고 있다. 보탄이 사랑하는 그러나 벌해야만 하는 딸을 위해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선물은 바로 불로 그녀를 감싸는 것이다.

그가 누구든지 내 창끝을 두려워 하는 자는 이 불을 건너지 못하리라 라는 노래를 부를 때 뒤로 퍼져 나오는 동기는 매우 비장하지만, 실은 코메디이다.

 

반지의 절반이 끝났다. 여기까지 쫒아온 당신은 스스로에게 대견해 할만 하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스타벅스 들려서 비싼 커피라도 한잔 마시라. 더 비싼 돈 내면서 이 고생을 하는데, 까짓 커피 한잔 못 마시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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